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이 자료는 주로 1910년부터 1953년까지의 당시 뉴욕 주재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Board of Foreign Mission) 중 한국 선교 관련 문서를 묶은 것이며, 장로교 해외선교부는 현재의 미국 연합 장로교회(PCUSA: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의 전신이다. 최초로 한국에 도착한 장로교 선교사는 알렌으로, 그는 애초 중국에 파송되었지만 1884년 9월 20일 미국공사관 담당 의사 자격으로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입국하여 가족과 함께 정착하였고 이후 1887년 광화문사거리 인근에 장로교의 첫 교회인 새문안교회가 문을 열었다. 미국 감리교(Methodist Episcopal Church)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884년 미국 선교사 매클레이(Maclay)가 입국한 것이 처음이지만, 매클레이는 선교 허가만 취득하고 곧 한국을 떠났다. 미국 감리교에서 해외 선교는 해외선교부(Division of Foreign Missions)가 담당하고 있는데, 해외선교위원회(Board of Foreign Missions)가 1912년에 개편된 조직이다. 이 조직에서 해외 선교에 필요한 계획과 기본 정책을 수립하고 선교 지역 및 선교사 선정 등의 업무까지 관장하였다. 광주오피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에서 주고 받은 서한, 선교위원회에서 회람된 편지, 교육 및 의료 활동 기록, 개인 서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한, 메시지, 회의 비망록을 비롯해 1950년 여름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 작전, 원자 폭탄의 사용 가능성에 대한 언급, 1951년 초 유엔과 한국군의 후퇴의 가능성, 리지웨이의 유엔 사령관 전투 능력 향상을 위한 노력, 맥아더의 사령관 교체, 육군의 인종통합, 인력과 교체 문제, 전쟁포로와 퓨전협상을 포함한 전쟁의 다양한 측면을 포함한 보고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초간본이 거의 유실되자 19세기 초 그를 제향한 居昌 屛巖書院에서 중간을 도모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密陽卞氏 家에서는 屛巖書院을 건립하여 卞仲良ㆍ卞季良ㆍ卞璧을 제향하고, 卞季良의 문집을 중간하는 등 변중량ㆍ변계량ㆍ변벽의 행적을 현창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Ⅱ. 密陽卞氏 가와 訴訟 자료 밀양변씨 가의 자료는 賣買明文과 所志 등 訴訟 관련 자료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본 사료군은 Office of the Assistant Secretary for International Affairs와 그 선행 부서들의 자료를 종합한 것으로서, 자료 생산 부서의 성격상 포함 문서들의 주요 주제는 국제관계, 국제금융, 원조 등 경제적 문제가 주를 이룬다. 미 재부부내 국외관계/국제금융 관련 부서의 자료이다. 하나는 양월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던 자료이고, 다른 하나는 구강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자료, 마지막은 유향소에서 소장하던 자료이다. 미 육군수송부대 관련 자료이다. 미 재무부내 국제업무 관련 부서는 1930년대 이래 확장과 전문화 과정을 거치는데, 1938년 Division of Monetary Research가 만들어지고 또한 1942년에는 Office of Foreign Funds Control가 세워진다. 이들 두 부서는 1942년 Office of International Finance로 통합되어, 1962년 Office of International Affairs을 거쳐 최종적으로 1964년 Office of the Assistant Secretary for International Affairs로 성립된다. 한편 일부 내용은 LexisNexis사에서 UPA collection의 일부로 Office of the Assistant Secretary of for International Affairs Geographical Files: The Far East, 1944-1959 라는 이름으로 마이크로필름으로 간행하였으며 현재 국편에도 소장하고 있다.
현재 경주최씨라고 하면 교동에 있는 최씨가 잘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소위 경주 최부잣집으로 역시 최진립의 후손이 된다. 한국관련 부분에는 윌리엄 원이 주고 받은 전신과 편지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프란체스카로부터 온 편지, 국내 관료들로부터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동향을 보고 받은 것 등이 있음. 의 인물, 행정, 조직과 관련된 편지, 보고서, 게시물, 명령문, 지시문, 양식, 챠트, 근무자 명단, 전문, 기타 기록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로 단장과 그의 직속 사무실에서 생산 및 보관된 것들이다. 그의 문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핵심적인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컬렉션은 대부분 Harry S. Truman 대통령과 연관성이 있거나 트루먼 행정부에서의 그의 근무와 관련되어 있다. 향교에서 나오는 수입은 대부분 각종 제례 비용으로 지출되었고 향교의 기본 경상비와 校任ㆍ유생의 활동비로 쓰였다. 강루리 동안에 입록된 사람들은 대부분 양반층으로 생각되지만 갑오년에 입록된 金萬冑ㆍ李載冑ㆍ李震弼 등은 향리 가문으로 보인다.祗謁ㆍ瞻謁ㆍ帶恩祗謁로 기재되어 있으며 계묘(1843)년 式年試 丙科에 합격한 朴公鎭이 帶恩祗謁한 사실도 기재되어 있다. 1430)은 李穡ㆍ權近의 문인으로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개국 직후 예문관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세종 때 경주와 함께 이곳에 경상도 감영(監營)이 설치되었고, 1459년(세조 5) 진(鎭)이 설치되면서 상주는 경상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954년 이후 순심중학교 학교 기록과 개인 일기류를 수집할 수 있게 되었다. 2차대전기 7군 사령관으로서 유명해진 뒤, 그는 “Lightning Joe”라는 닉네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1949년 미육군 참모총장이 되어 1953년까지 근무했다. 이후 그는 육군장관 특별 보좌관으로서 청구권 관련 국무부 특별 고문으로 근무했다. 품목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흥학재 관련 내용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1632년에 발급된 것으로 姜? 1973년 주미대사관 공보관 근무 중 유신에 반대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후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미주 의장을 지냈고, ‘박동선 사건’ 당시 미 의회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힘썼다. 방선주 박사는 1963년 미국으로 유학한 후 40여년간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출입했고, 국사편찬위원회와 함께 한국 관련 사료를 조사 및 수집하였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허정 과도정부 청와대 대변인,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공보비서, 초대 미 공보관장, 프랑스 공사 등을 역임하였다. 또 이 집안 인물이 주고받은 간찰에는 고종대 이후 영남만인소의 소수로 활동했던 김석규, 권연하 등과 주고받은 편지도 많다. 이 자료에 포함된 서한은 주로 뉴욕에 소재한 승인위원회(Board of approval)와 주고받은 것들로,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개인 서한과 현지 상황 보고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